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클레오파트라 7세 (문단 편집) == 여담 == 사치스러움을 과시하기 위해 [[진주]]를 [[식초]]에 녹여먹음으로 주위를 놀라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 안토니우스와 하루에 20만 세스테르티우스 상당의 돈을 다 써버릴 수 있느냐 없느냐는 내기를 걸어서 진주를 식초에 녹인 다음 [[원샷]]으로 승리했다는 일화다. 그런데 사실 진주는 식초 정도의 산도에는 그렇게 빨리 녹지 않고, 강산을 들이부어야 순식간에 녹는다고 한다. '''[[황산(화학)|황산]]'''이나 '''[[염산]]'''을 쌩으로 들이켰다고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아마 거짓과 과장이 상당히 많이 가미된 에피소드일 터이다. 역사학자들의 추정에 따르면 클레오파트라는 사실 진주를 식초에 녹인 척 하고 그냥 삼켜버렸을 것이며 그 진주는 나중에 '''[[똥|자연스러운 배출 과정]]을 통해''' 회수되었을 것이라 한다. 전승에 따라서는 양 귀에 진주 [[귀걸이]]를 달고 나와서 연회 끝무렵에 시종에게 식초를 두 잔 가져오게 해 우선 귀걸이 한 쪽을 떼어서 식초에 넣어 마셔버렸다. 그리고 다른 한 쪽도 떼어내려 했는데 놀란 안토니우스가 패배를 인정하고 두 번째 진주를 먹는 것은 제지했다고도 한다. [[양귀비]]가 [[여지]]를 좋아한 만큼 [[클레오파트라]]는 [[무화과]]를 좋아했는데 굉장한 대식가여서 하루에 먹어 치우는 [[무화과]]나 식사량이 엄청났다. 클레오파트라가 시원시원하게 먹는 모습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반했다고 한다. 클레오파트라의 자녀들 중 카이사리온은 아우구스투스에게 살해되었고, 안토니우스와의 사이 두 아들도 행적이 전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요절한 것으로 보이지만[* 일부러 죽였을 가능성은 적다. 옥타비아누스의 입장에서 카이사리온은 유일한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남기 위해서 반드시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될 위험분자이자 라이벌이었지만 안토니우스의 아들들은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이쪽은 어차피 정치적으로는 딱히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은 안토니우스의 전 부인이자 옥타비아누스의 누이인 옥타비아가 데려다 키웠다고 한다.], 딸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는 지금의 리비아인 누미디아의 왕 유바 2세와 혼인하여 자손을 남겼고, 이들의 자손들은 로마 귀족들과 오랫동안 통혼했다고 전한다. 클레오파트라가 식초에 녹여마셨다는 진주 일화에서 쓰인 [[식초]]는 [[와인]]으로 해석되기도 하는데[* 그런데 이 시절 와인들은 죄다 유통기한이 길지를 못해서 1년만 넘겨도 와인 상태를 유지한다면 상등품으로 취급받았다. 왜냐하면 고대 시절 많은 와인들은 기껏 만들어놔도 1년도 못 넘기고 상하거나 식초가 되거나 둘 중 하나였기 때문. 저장기술과 숙성기술 등이 발전한 현대는 10년 이상 묵힌 와인도 판매되고 있다는거랑은 천지차이.] 그 중에서도 마레오틱 와인(mareotic wine)이란 고대 이집트산 [[화이트 와인]]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 현재 이 고대 와인의 이름을 따온 마레오틱 와인이란 현대 이집트산 와인이 생산되고 있고 재배지도 두 와인의 이름 유래가 된 마레오틱 호수 주변이라는 게 공통적이다. 다만 당시의 재배 환경이나 포도 품종 등이 현대와는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아서 맛이 같진 않을 거라고 한다.][* 그녀가 와인을 마셨다면 그 와인은 달았을 가능성이 높으리라고 현대 사람들은 추측하고 있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910211643066763|#]] 클레오파트라가 살던 고대 시절엔 어떻게든 당도를 높이고 알콜도수도 높인 와인들이 고급으로 취급받았으며, 당도를 높이겠답시고 끓인 포도즙과 [[꿀]]을 넣는 건 물론 [[납]]을 써서 포도주의 단맛을 올리려는 시도까지 했다. 납으로 된 잔을 쓰거나 납 용기에다 포도주를 끓이거나 아예 납을 직접 넣어버리기도 했다고. 이 때 납이 동원된 이유는 포도주 속 아세트산과 납이 반응할 경우 아세트산 납이 만들어지는데 이게 단맛이 나기 때문. 그리고 납은 일단 방부제 역할도 해서 넣었던 걸로 보인다. 당연히 납 중독의 위험이 따라다녔지만.] 이외에 그녀가 와인 목욕을 했다는 말이 있지만 이건 헛소문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남녀 태아의 발육에 속도 차이가 있는지 궁금하다는 이유로 여자 노예 여럿을 임신시킨 뒤 산 채로 배를 갈라 아이의 발육 정도를 확인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다만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막 갖다붙이는 '폭군의 악행' 내러티브의 스테레오타입이라 믿을만한 출처가 없는 한 걸러 듣는 것이 좋다. [[중국]] [[상나라]]의 [[제신]]과 [[달기]],[* [[주왕]]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상나라 마지막 군주 제신과 그의 아내 [[달기]]에 관련된 흉악한 기록들은 주나라가 크게 과장했다라는 설이 현재 역사학계의 중론이다. 여기서 소개되는 클레오파트라의 악행들도 이와 비슷한 사정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토록 망국의 군주들에 관한 고대의 기록들은 왜곡되거나 과장되었을 확률이 높기 때문에 각별한 주의를 요한다.][* 단, 원래 상나라는 인신공양이 상당한 규모로 일어났던 나라다. 이는 과장이 아니며, 갑골문 유물들로 증명이 된다. 오히려 갑골문과 고고학적으로 추적할 경우, 제신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혹형들을 뛰어넘는 짓들이 이미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파악된다. 기록 자체가 마냥 거짓은 아닌 것으로 보이나, 그 책임이 마지막 군주와 그 아내에게만 집중되는 기록이 문제가 되는 경우다.][* 또한 주를 비롯한 변방국가들은 은나라가 행하던 인신공양의 희생용 공물을 마련하는 곳이었으므로 주나라에서 은나라에 이런 면에서 원한을 가졌을 가능성이 높았던 만큼 은에 대해 좋은 말을 써 줄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일본사]]의 [[부레츠 덴노]], 그리고 더 고대의 파라오,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 등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붙어있다. 이미지로만 본다면 고대 이집트 문명 출신처럼 생각되고 또 그렇게 묘사되지만, 기원전 69년 출신으로 이집트 역사에서는 중간기 정도의 인물이다.[* 물론 이집트 기준이다. 기원전 69년은 [[박혁거세]]가 출생했다고 알려진 해이니, 전세계적으로 보면 21세기 시점에서 클레오파트라는 어마어마하게 옛날 사람임은 틀림없다.] 기자의 대피라미드가 지어졌던 기원전 2560년보다 오히려 현대에 더 가까운 인물이며, 고대 이집트 문명보다 나중에 생겨났던 고대 그리스 문명보다도 더욱 나중에 생겨난 고대 로마 문명([[로마 제국|지중해권 완전 통일]] 이전)과 동시대의 인물이다. 굳이 말하자면 고대 이집트 말기의 인물이라고 보는 게 나을 것이다. 고대 이집트 시기라는 것이 한 시기로 묶이긴 해도 사실 여러 왕조를 거치는 어마어마하게 긴 시간 동안 존속되어 온 시대로, 최초의 이집트 통일은 기원전 3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현대 이집트 역사학계에서는 고대와 중세의 분기점을 보통 이슬람 세력이 이집트로 입성한 연도인 639년을 기점으로 삼는 것이 주된 견해로, 역사과목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반영되어 클레오파트라의 일대기를 고대사로 가르치기는 한다. 안토니우스와의 사이에서 얻은 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는 오늘날 모로코에 위치한 로마의 클리엔테스 왕국 마우레타니아(오늘날의 [[모로코]])의 왕 [[유바 2세]]와 결혼해 왕비가 됐다. 어머니를 닮아 총명했던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는 교양인으로 유명한 현군 유바 2세와 함께 마우레타니아의 부국강병을 이끌어냈고, 마우레타니아의 번영은 클레오파트라의 외손자(유바 2세와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의 아들)까지 이어졌다. 이 외손자가 바로 '[[프톨레마이오스(마우레타니아)|마우레타니아의 프톨레마이오스]]'로 불리는 프톨레마이오스인데, 그는 자신의 부모님을 신격화시키고 스스로를 살아있는 신으로 자처하면서 농업생산력을 증대시키고 군사원정을 벌이며 국력을 신장시켰다. 이때 프톨레마이오스 왕은 외할머니처럼 로마의 친구라는 칭호 속에서 마우레타니아를 지중해 서부의 부유한 국가로 이끌면서, 로마 내 유력자들과의 친분 속에서 그 영향력을 확장한다. 그는 자신이 [[안토니우스]]의 외손자이고, 어머니의 이복자매 [[소 안토니아]]와 그녀의 두 아들 [[게르마니쿠스]], [[클라우디우스 1세]]와 어릴 때부터 함께 로마에서 자라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황족들과 원로원 귀족을 남편으로 둔 여동생 드루실라 및 현직 원로원 의원들인 조카들을 통해 인맥으로 이어진 원로원 주요인사들과의 친분을 철저히 이용했다. 그래서 프톨레마이오스는 60년을 갓 넘은 원수정 체제의 한계와 로마 내 권력구도를 기회삼아 로마 내정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런 까닭에 클레오파트라의 외손자 프톨레마이오스는 당시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의 증손자로 당시 황제였던 [[칼리굴라|가이우스(칼리굴라)]]와 로마 원로원 및 당시 집정관 등 최고위층들에게 과거 클레오파트라처럼 위험인물, 경계의 대상으로 제대로 찍히게 됐다. 따라서 그는 서기 40년 로마를 방문했다가, 이를 크게 경계한 황제와 원로원 수뇌부들의 지령에 따라 암살됐다. 이후 로마는 이집트를 병합할 때처럼 마우레타니아를 속주로 만들 준비에 들어가는데, 이에 베르베르인들은 크게 반발해 무려 3년 가까이 전쟁이 지속됐다. 당시 로마군은 프톨레마이오스 암살 이후 몇 달 되지 않아 공화정 복귀를 원한 원로원 일부 의원과 공모한 근위대장 [[카시우스 카이레아]] 및 휘하 20명에게 가이우스 황제가 서기 41년 피살된 상황 속에서 잠시 헤맨데다 베르베르인들의 저항이 거세어 초반에는 고전했다. 그렇지만 애당초 로마의 국력은 피살 전 칼리굴라의 판단처럼 큰 무리가 아닌 까닭에, 다음 황제로 즉위한 칼리굴라의 삼촌 클라우디우스 1세가 공화정 복귀 움직임을 제압하고 원로원을 물갈이해버린 이후 반격하면서 기어이 마우레타니아를 굴복시킨다. 이때 로마는 칼리굴라 시대때 계획한 전략에 따라 이 왕국을 두 개로 쪼갠 다음 속주로 병합시켰다. 2023년 새로 발행되는 [[이집트 파운드|이집트 20파운드]] 폴리머 지폐의 도안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